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누가복음15:11~32)
들어가기: 부천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
- 13살 중학교 1학년 여자아이가 11개월 동안 죽은 채로 자기 방에 방치되었다. 그 아이가 가출하자 5시간 폭력을 행사하다가 죽자 그렇게 했다. 그의 아버지는 목회자요 독일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신학교 교수이다. 목사인 저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외에도 같은 유형의 사건들이 자주 발행한다. 왜 그런가? 우리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소중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그 진실을 입증하는 예이다.
서론: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나?
오늘 살펴볼 이야기는 우리가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아주 소중한 것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이 이야기의 맥락은 15장 전체에서 언급하고 있는 세 이야기의 중의 핵심이다.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가. 어떤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온다. 그에게 소중한 것은 양 우리에 있어야할 양이다.
나. 어떤 여인이 동전하나를 잃어버리자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찾아낸다. 그녀에게 소중한 것은 열 닢의 한 꾸러미에 있어야할 동전이다.
다. 어떤 사람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다시 귀향한다. 그 아버지에게 아들은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돌아온 작은 아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는 세리들과 죄인들이다. 우리도 그 세리와 죄인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늘 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이며 예수님은 그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기쁘게 여기신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품에 돌아온 후부터 시작된다.
사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며 궁금한 것이 있었다. 작은 아들이 돌아와서, 새생명잔치가 끝난 후 어떻게 살았을까? 그에게 이 전보다 더 많은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 채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돌아온 것만으로 아버지의 기쁨이 되었던 아들은 점점 아버지의 기쁨조가 되어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는 않았을까?
이 이야기의 말미에는 집안에서 열심히 아버지를 위해 섬겼던 형이 등장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큰 아들을 달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점점 은혜의 본질이 퇴색되고 은혜를 감싸고 있는 껍데기에 집착하며 살아간다면 부천 사건의 아버지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시작한 우리의 인생은 되찾은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의 원천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자.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제가 발견은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소중한 것은 세 가지이다.
1. 고향에서의 풍성한 삶: 뿌리
1) 태초의 고향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장소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이 에덴동산이며 본래의 고향이다. 그곳은 하나님이 머무는 곳이며, 그분의 창조의 손길, 숨결, 생명을 누리는 곳이다. 인간은 그곳에서 영생의 샘물을 마시며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았다. 본문의 이야기는 그 에덴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있는 고향에 머물면서 이런 복을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아들은 무엇이 부족했는지 아버지 곁을 떠나려고 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는 또한 무엇이 부족했는지 하나님이 금지한 약속의 울타리를 벗어나려 했던 것일까?
2) 고향을 떠난다는 것의 의미
가. 유산을 요구함
-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돌로 쳐 죽여도 부족할 정도로 무례하고 극악한 행동이다. 아버지에게 큰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자기 몫을 챙겼다.
-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 몫을 챙기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몫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지우고 싶어 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주신 살림을 돈으로 바꾸었다. 자신의 사용하기 편리한 도구요, 자신만의 권력으로 바꾼 것이다.
나. 먼 지방으로 떠남
- 아들은 먼 지방으로 갔다. 이는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마음껏 살고 싶어 하는 아들의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아버지의 울타리가 보호의 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 인간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하나님처럼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욕망의 울타리를 넘어섰다. 너무 멀리 나간 것이다.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구속의 족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3) 타향살이
가. 끝이 있는 삶
- 작은 아들은 타향에서의 삶이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재생하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 자유를 누린 것은 아버지가 주신 유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다. 자유를 위해서 아버지를 벗어났지만 아버지의 유산으로 자유를 구했으니 말이다. 이런 삶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그것은 방탕한 삶이요, 낭비하는 것이다.
나. ‘방탕’과 ‘낭비’의 삶
-방탕=‘아 + 소토스’ : 구원과 전혀 무관한 삶
-낭비: 곡식을 까불 때 바람에 날아가는 쭉정이의 모습
그가 가지고 있는 돈은 아버지와 아무 연관이 없는 삶의 수단일 뿐이다. 그 돈으로 친구를 얻고 기쁨을 샀다. 행복해 보이는 것 같지만 그것은 방탕한 삶이요 낭비였다. 이런 삶은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삶이 겉보기는 좋아 보이고 행복해 보이지만 영적인 고향을 잃어버렸다면 결국 낭비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가 있는 본향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한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이다. 우리의 일상이 변함이 없고 무의미해 보이지만 그것은 하늘의 생명과 연결된 삶이다.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나무의 줄기를 통해서 나뭇가지에 생명이 공급된다. 나뭇가지와 같은 우리의 인생이 결국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다. 이것이 구원의 여정이며 그러기에 소중한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줄기를 떠난 나뭇가지는 결국 말라서 불에 때워질 뿐이다.
2. 아버지의 사랑: 생명
1) 아들의 (의지) 까지 존중하는 사랑
* 아버지의 ‘살림’ ↔ 아들의 ‘챙김’
아들이 유산을 달라고 할 때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유산을 나누어 준다. 본문에서는 그 유산을 살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 인생의 채취가 묻어나는 생명과 같은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무정하게 자신의 몫을 챙겨서 그것도 그 살림을 다 처분해서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척 속상했을 것이다. 저 같으면 재산을 고사하고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무례한 행동을 고쳐놓았을 텐데, 그저 아낌없이 자신의 살림을 내어준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자신이 받은 상처보다는 아들의 마음과 의지를 존중한다. 언젠가는 아들이 세속의 욕망을 쫓는 대서 돌이켜서 마음을 돌이키고 아버지를 신뢰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딸을 살해한 부천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가출한 일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목사요, 교수인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생각에 분노를 폭발했을 것이다. 사랑을 잃어버렸다.
2) 아들을 끝까지 (추적) 하는 사랑
자유를 찾아 떠난 아들은 재산이 떨어지자 이제 종이 되었다. 구원과 상관없는 재산을 의지하는 삶의 말로이다. 아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이방인 밑에서 복종하는 인생을 살아야했다.
여기서 놀라운 비밀을 발견한다. 아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해버리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 14절에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큰’이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신적인 개입을 묘사할 때 성경에 가끔 등장하는 단어이다. 아버지는 고향에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계속해서 아들을 쫓고 있었다.
*존 스토트 신부의 글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제 부모나 스승의 영향도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저 자신의 결단 때문인 것도 아니며, 바로 천국의 사냥개 때문입니다. 즉, 제가 원하는 길로 가고자 도망할 때조차도 끈질기게 저를 쫓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입니다”(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하나님은 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존 스토트 신부를 쫓아왔다. 15장 전반부의 두 이야기, 즉 잃어버린 양을 끝까지 추적하는 목자와 동전 한 닢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을 샅샅이 뒤지는 여인의 모습 속에서 추적하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 같다. 그리고 창조주의 임재와 존엄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에게 자신을 맡길 때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하고 죄가 되는 것인지 발견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있는 고향, 품꾼조차 먹을 것이 남아도는 그 풍성한 곳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세상살이에 다 필요한 것들이다. 원만한 대인관계에서부터 마음껏 누리고 싶은 경제적인 여유, 똘똘한 자녀들, 강인한 체력 등. 사실 우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더욱 집착하고 고민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낭떠러지의 나뭇가지에 불과하다. 그것을 놓을 때, 떨어져 죽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는다.
3) 아들을 (환대) 하는 사랑
*‘측은히 여겨’ - 요3:16 ‘... 이처럼 사랑하사 ...’
집나간 아들과 늘 함께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그의 극진한 환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아직도 먼 거리에서 걸어오는 아들의 모습을 아버지만 발견한다. 체면불사하고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춘다. 헐레벌떡 뛰어가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다. 헐레벌떡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으로 달려오는 하늘 아버지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압받고 그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아픈 자들과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과 죄의 대가를 십자 위에 짊어지고 골고다로 향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20절에 보면, 측은히 여겨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요3:16에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표현에서 ‘이처럼’이라는 뜻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이유 없이 우리를 환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이 그분의 성품이기에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 속에서 죄의 모든 고통의 대가를 치르시고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늘 아버지는 세상의 수고를 다 마치고 돌아온 아들에게 하늘 보좌를 내어 주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옷을 갈아입히고 샌들을 신기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셨다. 아들로서 자격을 회복시켜주시고 그 아들의 신분에 걸 맞는 명예를 회복시켜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돌아온 때를 기억한다. 고아 같은 우리를 자녀삼아 주시고, 창녀 같은 우리를 신부삼아 주셨다.
3. 이웃사촌공동체: 소명
1) 나를 존귀하고 의미 있게 하는 공동체
아들이 고향을 떠나 올 때, 잃어버린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나를 자라게 해 준 고향 사람들이다. 내가 어렸을 때, 온 이웃이 가족이었다. 그들은 나를 자녀로 대해주었고, 그들 또한 나의 부모와 가족이 되어 주었다.
타향 속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2) 나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공동체
내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한다. 이미 그들과 문화를 함께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서 살 때, 나의 정체성이 모호했다. 나의 가족이 한국에 돌아온 이유 중의 하나도 자녀들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나 또한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알게 한다. 우리는 공통된 하나님나라의 문화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3) 나의 소명을 깨닫게 하는 공동체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잔치가 벌어졌다. 교회공동체는 회개하고 돌아온 이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 곳이다. 그렇다면 그 공동체에 속한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한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야한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더러 양 잃은 목자처럼 동전 잃은 여인처럼 잃어버린 사람을 찾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우리와 함께 잃어버린 사람들을 추적하신다고 일깨운다.
*스페인에서의 한 광고
스페인의 한 아버지가 마드리드로 도망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결심을 한다. 몹시 후회스러운 아버지는 [엘 리베랄] 신문에 광고를 낸다. "파코, 화요일 정오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는 흔한 이름이다.
아버지가 호텔 앞 광장으로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청년이 무려 800명이나 나와 자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어메이징 그레이스-필립얀시]
결론: 그리스도인은 본향에 뿌리를 내리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살아가며
이웃과 함께 참된 축제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다.
부천의 아버지는 비록 성경을 가르치고 신학자였지만 그의 삶은 본향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세속에 물든 비참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신학공부가 오히려 본향을 멀리 떠나오게 하고 가족과 이웃을 잃어버린 결과를 초래한 것 같다.
우리 모든 인간은 먼 옛날 에덴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불신자들은 그것을 망각하는 자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기억을 되살린 자들 이다. 지금은 비록 상처 입은 고향에서 돌아와 살고 있지만 새롭게 변화될 그 영원한 고향을 소망하며 걷고 있는 나그네들이다. 우리가 붙잡아야할 것이 있다면 영원한 고향에 뿌리를 내리는 삶이다.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곳은 영원한 본향,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그분의 자녀요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공동체가 있다. 그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경험하고 누린다. 더불어서 그 사랑은 한 때 우리가 벗어났던 울타리 넘어 이웃에게까지 잃어버린 자들을 찾도록 우리의 어깨를 떠민다.
우리 해뜨는 마을 공동체가 서로에게 하나님나라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고 상처입고 소외되고 머물 곳 없는 이웃들에게 아버지의 품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통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삶으로 말씀읽기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며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인해서 일상에서 어떤 결정을 하며 살아가는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비추어보았을 때 내가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해뜨는마을 공동체에 바라는 것 무엇이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