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총 작가가 페북에 올린 글을 통해서 그 역사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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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총 (2017.04.04 페북)
4월 3일이면 나는 죄인이 된다.
사는 일이 죄 아닌 적이 없으나 이날은 고개 들 수 없는 참담한 죄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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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_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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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조직, 파송하고 후원했던 서북청년단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서북청년단 만행’이라고 잠깐 검색만 해봐도 수두룩하게 나온다. 그들의 악마성이 4.3을 일으켰다 한들 과언이 아니다.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는 1949년 초 어느 자리에서 "서북청년회원 등 육지의 사람들이 경찰·상인·관리 등이 되어 도민을 괴롭혔기 때문에 4·3폭동이 난 줄 안다"고 증언했다. 읽기 힘들어서 기사 두 군데만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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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또는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 약칭: 서청)은 '인간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 주민들을 모아놓고 서로 뺨때리기를 시키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도 빰때리기를 강요했다. 세게 때리지 않으면 달려들어 죽도록 팼다. 돈을 모아 가든가, 소를 끌고 가야 그 짓이 끝났다.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자들을 겁탈한 후 고구마를 쑤셔 대며 히히덕거리기도 했다.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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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 가족을 지서로 끌로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버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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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서청이 '국가유공자'로 뽑혀 정부의 보훈대상이 되었다. 인간이길 거부했던 저들에게 우리가 낸 세금으로 연금을 주었다! 반면 저들의 광기에 희생당한 분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그 울분을 입도 벙긋 못하고 살았다. 마침내 4.3 특별법 제정으로 66년 만에 통곡할 자유를 얻었지만 그분들의 눈물은 아직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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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사죄해야 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그분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함으로 사죄해야 한다.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라"한 말씀을 두렵게 받들어야 한다. 결자해지라 했는가. 우리가 그 원통함을 유발했으니 우리가 풀어줌이 마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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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교회가 4.3을 통회하지 않았기에 세월호의 아픔에 등을 돌리는 잔인함을 반복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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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나의 목회자요 예수쟁이입니다만 4.3 제주 69주기를 맞아 참회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아파하겠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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