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내것인듯 내것아닌 나와 같은 우리 공동체: 내것인듯 내것아닌 나와 같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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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내것인듯 내것아닌 나와 같은 우리

교회에 관한 생각들

by Sungmin Kim 2016. 6. 21.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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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정교회가 연합으로 엠티를 갔다. 함께 모여산다는 것은 내것인듯 내것아닌 내것같은 너와 나를 받아드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최규창 형제가 본인이 속한 함께사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에 관한 글이다.

그의 아내의 말대로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쓰기 했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에 대해 배울 것이 많다.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m/post/644) 


덧 붙여서, 내가 생각하는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1.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만든 12명의 예수제자공동체가 원형 모델이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발견된다. 그 중에 하나는 제자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제자들의 배경은 우리의 생각만큼 그닥 이질적이지 않았다. 같은  갈릴리 지방출신에다 학식과 경제면에서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설명할 때, 작은 겨자씨 비유를 들어 이야기 했는데 그것에 걸맞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자들의 성향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부들이 있었고, 열심당원들과 심지어 서로 적대적인 세리도 있었다. 성격면에서도 셈이 빠른 사람, 다혈적인 사람, 온유한 사람 등 다양했다. 이런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됨의 당위성도 없을 뿐더러 가능성도 없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선택해서 따라 오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3년동안 동거동락하며 지냈다. 그러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나라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감당해야할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이고 앞으로 제자들이 감당해야할 소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 즉,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하나님나라의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의 사역은 그 공동체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며 지탱해야할 믿음의 기반이고 추구해야할 사명이 되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다른 측면의 사역이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공동체는 그의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고 세상에 구현하는 외형적인 몸과 같은 것이다. 


2. 우리가 지금 해야할 일은 이런 공동체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초기 단계에서 그것이 유대회당을 본따서 교회가 되었고 로마의 공인 이후에는 거대한 제도가 되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후에는 초기 단계의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도로서 교회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근래에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제발견하였다고 생각된다.  

사도바울이 선교여행을 통해서 개척한 교회는 어느 정도 제도적인 틀을 갖추어나가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물론 초기에 대부분이 가정에서 모인 교회였기 때문에 예수공동체의 역동성은 살아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점점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배경과 성향의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자 제도적인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여러 이슈들을 다루기 시작하였다. 바울서신의 대부분이 이런 이슈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좋았다. 교회가 제도로서 강점을 잘 발휘할 정도까지 공동체의 울타리로서 존재하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기원후  4세기에 기독교가 국가 종교가 된 이후 교회는 점점 예수님이 세운 제자공동체의 정신은 사라지고 권력기관이 되어버렸다. 이 것은 엄청난 어긋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문화 속에서 예수제자공동체를 회복할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다. 

어떤 사람은 그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공동체의 형성보다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내용이라고 한다. 그래서 각 교회가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 올바로 배우고 잘 전달해야하는 것을 더 시급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진리가 무엇인지 바르게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으로 교회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올바른 진리의 선포와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배운 진리를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살아낼 수 있는 몸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만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 분이 곧 진리였기에 그 분의 말씀이 어떻게 구현되는 지 몸소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떠난 후에도 제자들은 그 분의 말씀이 마치 곁에서 살아있는 듯이 행동했다. 

내가 살아가는 도심에서,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도시적인 삶에 익숙한 이 사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치 살아있는 인격으로 우리와 동거동락할 수 있는 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1) 예수님과 연합된 공동체로서의 규모

사도바울은 교회의 공동체를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하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동시에 실감할 수있는 작은 규모의 공동체가 바람직하다. 동시에 실감한다는 의미는 서로의 감정선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서로의 문제에 책임까지 질 수 있는 정도이다. 가족이라는 의미가 더 와 닿을 것 같다. 한 지체가 아프면 내 마음이 동시에 짠하고 아픔을 느낄 정도. 한 지체가 경제적으로 힘드면 내 문제인양 고민하고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정도. 

한 가정에서 모일 정도의 규모면 적절하다. 12명에서 많게는 20명 정도의 규모는 서로가 한 몸이라는 의식을 갖고서 주기적으로 함께 모여 공동체성을 확인하기에 좋다. 인원이 많아진다면 계속해서 분리하여 또 다른 모임을 구성한다. 


2)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기

한 가정에서 모이는 그룹을 가정교회라고 편의상 부르자. 가정교회 모임에서는 늘 예수님의 가르침이 살아있어야한다. 즉, 넓게는 성경 전체의 흐름과 사상, 그리고 구체적인 말씀을 연구하고 나누는 활동이 활발해야 한다. 물론 가정교회가 많아진다면 공동으로 성경을 배울 수 아카데미를 열 수도 있다. 그리고 가정교회 모임에서 성경 본문의 한 부분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실천한 내용을 나누는 것이다. 매일성경과 같은 큐티책을 가지고 함께 읽으며 나누어도 좋을 것이다. 


3)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한 가정교회에서는 항상 갈등이 내재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의 성향과 기질이 상당히 이질적이다. 이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 신앙의 신비이다. 원론적인 해답은 예수님처럼 나를 겸손히 낮추고 상대를 높이면 된다. 모두가 같은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완벽한 천국이다. 그러나 그럴 일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날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 하지 말자.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그 과정이 시간이 걸린다. 서로를 알아가는 것은 관찰과 배려가 필요하고 개인의 모난 부분이 꺾여 나가는 아픔을 겪어야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샘물이 흘러야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샘물이 흐르도록 또랑을 쳐야한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됨의 신비를 경험한 공동체는 이미 선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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