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6:1-11 / 언약궤를 가져오다.
2016.7.22. 금
1 - 5 다윗이 언약궤를 가져오다.
6 - 8 언약궤를 가져오던 중 웃사가 죽다.
9 - 11 다윗이 언약궤를 가져오기를 두려워하다.
1. 내용주해
1) 다윗이 언약궤를 가져오다.
- 다윗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왕의로 추대되고 나라가 안정이 되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고 군사 삼만 명을 모은다. 마치 대규모 군사작전처럼 일을 진행하는 것을 봐서는 다윗이 그만큼 이 일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언약궤가 있는 곳을 “바알레 예후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바알레’는 ‘주민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지명은 ‘유다의 주민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새번역에서는 “유다의 바알라”로 표기되어 있다. 학자들은 대부분 여호수아15:9에 근거해서 ‘기럇여아림’의 다름 지명으로 보고 있다. 여호수아15:60에서는 ‘기럇바알’로 불리기도 했다. 이곳은 블레셋이 쫓겨 갔던 게셀과 예루살렘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가 돌아 온 후 20년 동안 그곳에 있었다.
- 언약궤는 틀을 백단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입혔다. 그리고 황금으로 덮개를 만들었는데 그룹둘이 양 옆에서 날개를 펴고 있는 모형을 이루고 있다. 이 덮개를 속죄소, 또는 시은좌, 즉 하나님의 보좌라고 부른다. 언약궤 안에는 모세가 받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두 개와 만나가 들어있는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다. 그리고 언약궤양 옆에 막대기가 붙어있는데 이것은 어깨에 메고 옮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다윗은 언덕 위에 있는 제사장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꺼내서 새 수레에 실었다. 아마도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 새 수레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비나답의 아들인 웃사와 아히요가 수레를 몰도록 했는데 아히요는 수레 앞에서 걸었고 웃사가 직접 끌었던 것 같다. 사실 출애굽기(37:5)와 민수기(7:9)에 따르면 언약궤는 고핫 자손들이 메게 되었다. 언약궤를 취급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고 옮기는 방법도 수레에 싣고 가는 것이 아니라 메고 가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 동안 하나님의 율법이 읽혀지거나 가르쳐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규례에 대해 무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언약궤를 실은 수레가 앞서가자 다윗과 백성들은 모든 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하며 하나님 앞에 기뻐하였다.
2) 언약궤를 가져오던 중 웃사가 죽다.
- 언약궤를 싣고 오던 중 불상사가 발생한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어서 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그 궤를 붙잡았다. 별반 잘 못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웃사를 그 자리에서 죽게 한다. 왜 그런 벌을 내리셨는지는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짐작컨대 하나님의 성물을 다룰 때 신중하게 행동해야했다. 레위기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지 않는 불로 향을 피우다 그 자리에서 불에 타서 죽고 말았다. 남들보다 특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제사장들에게는 엄중한 벌이 내려졌다.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질 때 어떤 일을 완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며 순종하는 것이 중요했다.
- 다윗은 당황했고 긴장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화를 냈다고 했다. 아마도 다윗은 그 동안 하나님이 늘 곁에서 지켜주시고 승리케 하셨기에 이런 갑작스런 일을 겪으면서 감정이 격해졌을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 있는데 그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죽고 일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자 화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다윗은 그곳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고 했다. 즉, ‘웃사에게 분을 발하신 곳’이라는 뜻이다.
3) 다윗이 언약궤를 가져오기를 두려워하다.
-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행동에 대해 즉시 처벌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것을 멈추고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두게 된다. 블레셋의 가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한 지역 이름이다. 그리고 오벳에돔은 레위사람이었다(역대상15:17-19). 그의 집에서 석 달 동안 머물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 집 안에 복을 내려 주셨다.
- 아마도 오벳에돔은 언약궤를 아주 신중하게 다루었고 두려운 마음으로 관리했을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진노를 풀고 그에게 복으로 화답하였다. 하나님의 성품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거룩한 물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거룩하게 섬길 때 하나님은 벌하는 대신에 복을 내려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2. 적용
1) 하나님을 생각함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은혜와 사랑이 많으시고 너그러우신 할아버지처럼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분의 품안에서 풍성한 복을 누리는 것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거룩은 신과 인간을 구분하는 신적인 성품이다. 감히 근접할 수 없고 어떤 피조불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구별되신 분이시다. 그분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야한다. 우리가 손자손녀처럼 그의 앞에서 편하게 뛰어놀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분노를 감당하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살아가지만 그 은혜를 마치 자기가 성취한 것처럼 자기 능력을 과시하면 안 된다. 모든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리어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부려먹으려고 하는 것은 큰 죄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용당하거나 요구한대로 들어주시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고 경홀히 여길 때 하나님은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으로 인해 그 분노를 우리에게 직접 쏟아놓으시는 않지만 너무나도 안타깝고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신다. 그리고 기다리신다. 그 만큼 우리의 삶도 허무하고 고통스럽다. 돌이키는 수밖에 없다. 나의 모든 삶과 생명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분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겸손하게 그 분 앞에 무릎으로 사는 것이다.
2) 하나님을 위한 선한 일을 생각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우리는 선한 일을 생각한다. 다윗도 그랬다. 그 동안 자신을 지켜주고 모든 전쟁에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이 참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계신 곳,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모셔오고 싶어 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어느 곳이나 계신다. 언약궤는 단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관계의 모형일 뿐이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아직까지 언약궤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만나셨다. 다윗의 예루살렘으로 그 언약궤를 옮겨올 생각은 참으로 소중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 소중하다. 아무리 마음이 선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며 사역하지 않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무지를 반영하는 경우가 생긴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것이 율법이며 성경이다. 다윗은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과 규례들을 살펴보아야했다.
언약궤는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에 의해 메고 옮기는 것이다. 블레셋이 했던 방식으로 수레에 끌고 오는 것은 처음부터 잘 못되었다. 하지만 몰랐다. 몰랐다고 될 일은 아니다. 그로 인해 무고한 사람이 하나님의 분노를 받아 죽었다. 선한 일은 의도가 좋아도 나를 만족하기 위해 해서는 안 된다. 선한 일을 한 후에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내 마음의 기쁨을 채우려고 한다면 칭찬과 다를 바 없다. 선한 일은 받는 당사자를 회복하고 행복하게 하는 일이다. 선한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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