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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하배

교회에 관한 생각들/신학

by Sungmin Kim 2016. 7. 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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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에 있어서 간하배 교수의 글과 사역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은데,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단, 이분의 신학과 사역을 좀 더 공부하기 위해 스크랩했다. 

이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리디머 교회의 팀 켈러 목사, 이번에 풀러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게된 메뉴엘 오르띠즈 교수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도시 선교에 바탕을 둔 교회 사역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미셔널처치를 공부한 사람들이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는 한국에서 도시선교를 가르치고 사역했던 간하배 교수가 미국으로 돌아가 웨민에서 가르쳤는데, 그 곳 출신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셔널, 특히 도시선교를 공부한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출판된 팀 켈러 목사의 "센터 처치"라는 책이 간하배 교수의 글을 인용했는데, 한국 교회의 이야기가 실려있다고 한다. 난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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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선교진단] 간하배 선교사의 사역과 신학

간하배 선교사의 사역과 신학
김남식 박사(중화복음선교회 회장)

사람의 자취는 그의 일생을 마감할 때에 참 모습을 그려낸다. 또 평가하는 사람의 괌점 역시 하나의 지침이 된다. 이 땅을 거쳐간 수많은 선교사들은 복음을 위해 그의 젊음을 바쳤고 삶의 전부를 제물로 드렸다. 모두들 아름답고 소중한 헌신의 제물이었다.

간하배(1933~1999). 젊은 세대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그리운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거구의 미국 정통장로교(OPC) 선교사인 그의 이름은 Harvie M.Conn이다.
그와 교류하였던 지난 세월을 반추하며 그의 삶을 추적하려고 한다. 이것은 그의 사역과 신학을 이해하는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인
간하배 선교사(교수이지만 한국에서의 사역을 중심으로 선교사로 그리고 미국의 이름보다 한국 이름 간하배로 통일하여 부른다)는 1933년 캐나다의 곡창지대인 사스카추안 주의 수도인 레지이나(Regina)에서 태어났다. 캐나다의 대표적 스포츠인 빙상 하키선수였던 아버지를 닮아 그는 큰 체구를 가진 청년으로 자라났다.
중학교 시절을 미국 캘리포니아의 버클리(Berkely)에서 보냈는데 그때 친구의 권유로 언약교회(Covenat Church)에 출석하게 되었다. 이것이 교회와의 첫 번째 만남이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선교사가 되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게 된다.

그는 16세 때에 회심하게 된다. 언약교회 청소년들을 위한 여름 캠프가 네덜란드 계통의 기독교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캠프에서 열렸다.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믿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적 배경 속에서 1951년에 CRC의 고등교육기관인 칼빈대학(Calvin College)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954년 대학을 졸업한 후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입학한다. 목회에 대한 확실한 사명보다 가르치는 사역을 할 가능성을 가져 신학교에 진학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삶의 놀라운 변화의 계기였다.

한국 선교사로
신학생이 된 간하배는 목회 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뉴저지주 캠든시 교외에 있는 스트렛포트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목회란 쉬운 일이 아니고 공부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때 어느 기독교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오라는 청빙을 받았으나 그의 목회 멘토였던 알버트 에드워즈 목사의 권고로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는 스트랫포드 교회의 개척 목사로 공식 청빙되어 1957년 안수를 받게 된다. 그는 이 교회에서 1960년 한국 선교사로 떠나기까지 사역하였는데 당회가 구성되고 새로운 예배당 건물을 건축하는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는 1958년에 “The Concept of the Reason in the Theology od John Calvin”(칼빈 신학에 있어서 이성의 개념)이란 논문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Th.M.)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이 훗날 그로 하여금 반틸 교수의 후계자로 웨스트민스터에서 변증학 교수가 되게하는 바탕이었다.

간하배는 선교사보다 교수가 되고싶어 하였다. 그가 선교사가 된 것은 1956년에 결혼한 부인 도로시 디에드리히(Dorothy Didrich)여사의 작용이 컸다. 도로시는 간호사(RN)로 일하였고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조산한 아기들의 눈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필라델피아의 Wills Eye Hospital이란 병원에 근무한바 있다.
도로시는 간하배를 만나기 전에 이미 미국정통장로교(OPC)총회 해외선교부 임명으로 아프리카 에리트레아에 의료선교사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금 부족으로 출국하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도로시는 자기 교회 담임목사인 에드워지 목사의 소개로 당시 교회 개척을 하고 있었던 간하배를 만나게 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해외선교사로 나갈 것을 조건으로 두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1960년까지 선교비 모금에 문제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해 여름에 독일개혁교회의 한 노회에서 이들의 선교비를 지원할 것을 결의하자, 이들은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해 9월에 한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사역
간하배의 생애를 3기로 나눌 수 있다. 출생부터 한국에 오기 전까지의 1기, 한국에서의 선교사역 12년의 제2기, 1972년 이후 웨스트민스터에서의 사역 제3기로 구분된다.

간하배가 한국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OPC에서는 한부선, 하도례 선교사를 파송하여 부산에 주재하며 사역하고 있었다. OPC에서는 간하배를 서울에 주재시켜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하였다. 간하배의 한국 12년 사역을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교수 사역이었다. 그는 언어훈련을 마친 후에 총회신학교에서 강의하였다. 1965년에 전임교수로 임용되었고, 도서관장으로서 일하였다. 그의 전공이 변증학이었으나 신약학 분야를 강의하였고 교수가 없으면 다른 분야도 강의했다. 어느 날 필자에게 “찬송학만 강의하면 모든 과목을 다 강의해 본다”고 하면서 웃은 적이 있다.
그는 총회신학교 도서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도서관의 장서는 6,000권에 불과하였고, 새로운 도서를 구입할 재정적 여유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미국의 교회들과 친지들에게 도서관을 위한 후원 호소 편지를 보내어 도서 기증과 도서관 발전 기금확보에 노력하였다.

그는 기독교 문화의 확산과 기독교 도서보급을 위해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 1층에 ‘기독교 독서실'(The Christian Reading Room)을 개설하였다. 이 사역은 네덜란드개혁교회 선교부와 세계장로교 선교부가 협력하여 이루어졌고, 부산에서는 동광동 소재 부산남교회 1층에 ‘기독교 독서실’이 하도례 선교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가 총회신학교 교수로 사역하면서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신학지남」에 논문의 각주 형태를 도입한 일이다. 그때까지는 각주 없는 글들이었으나 간하배에 의해 오늘날의 논문 형태가 「신학지남」에 정착되었다.
둘째, 문서선교이다. 간하배는 한국사역에서 개혁주의 신학도서 출판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였다. 그는 사역 초기에 극동방송의 방송설교를 하였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쁨」(개혁주의신행협회 발행)으로 출간된 것을 시작으로 여러 권의 책을 내었다.

그는 「개혁주의신행협회」를 중심으로 문서선교에 노력하였는데 그의 대표적 작품은 「다니엘서의 메시야 예언」(정정숙 교수 역), 「현대신학해설」(정정숙 교수 역)이다. 「현대신학해설」의 시작은 필자가 「기독신보」에 재직하면서 기획시리즈로 연재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한글과 영어판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방송과 신문을 활용할 줄 아는 감각이 있었다. 외국의 신학 뉴스를 제공했고, 신간도서들을 보급하였다. 지금도 나이든 목사들 중에서 어려운 신학생 시절에 간하배 선교사에게서 영어 원서를 구입한 감격의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셋째, 사랑의 실천이다. 그는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을 하면서 농어촌 교회 방문을 하였고, 특히 윤락여성을 위한 돌봄의 사역을 하였다. 동두천 등지의 윤락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의 돌봄을 이루었다. 이것이 그의 사역 가운데 두드러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의 파도를 일으킨다.

웨스트민스터 교수로
1972년 간하배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변증학 교수로 초빙을 받는다. 그것도 코넬리우스 반틸 박사가 은퇴하고 그 후임이 되었다. 박사 학위도 없는 39세의 한국 주재 선교사가 발탁된 것은 놀라운 일인 동시에 그의 학문적 능력을 평가하게 한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변증학 교수로 출발하였으나 나중에는 선교학 교수로 헌신하였다. 그의 신학적 공헌을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교적 교회론의 체계화이다. 그는 교회의 사명을 예배, 양육, 복음선포, 공의를 행함, 긍휼의 사역으로 규정하였다. 역동적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 증거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Evangelism Doing Justice and Preaching Grace」(한국어판「복음전도와 사회정의」, 김남식 옮김, 도서출판 베다니)에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그의 신학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사야 61장 1~2절, 누가복음 4장 16절 이후에 언급되는 희년의 선포 속에서 나타난다.

둘째, 살아있는 개혁주의의 강조이다. 간하배는 복음이 스콜라주의나 교권주의에 갇혀 있는 ‘죽은 정통주의'(dead orthodoxy)여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또 일방적 상황에서 출발하여 상황에 끝나는 해결책이 없는 행동주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성경의 ‘Text’와 삶의 ‘Context’가 끊임없이 대화하여야 한다고 한다. 이 대화를 이끌어 가시는 분은 성경을 바로 이해하게 하고, 그 이해와 적용이 올바르게 이행되도록 내적 조명으로 동행하시는 성령이시다.
그래서 간하배는 고립적 보수주의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강조하고 이것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셋째, 현대도시를 향한 도전이다. 간하배의 사역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도시선교(Urban Mission)이다. 현대도시를 대변하는 노동자, 소수민족, 이민자, 도시빈민을 위한 선교적 돌봄이 이루어졌고, 이것을 ‘도시선교학’이라는 학문적 장르로 개발시켰다.

그 자신이 필라델피아의 빈민지역인 저먼타운(Germantown)에서 살았고, 허름한 옷차림과 낡은 소형차를 타고 다니면서 그의 신앙과 신학을 삶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도시교회를 위한 지도자 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Center for Urban Theological Studies(CUTS)를 세웠다. 같은 뜻을 가진 윌리엄 크리스핀 박사와 흑인교회 지도자들의 호응으로 이 기관을 키워나갔다. 또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들의 강의 협조가 큰 힘이 되었다.

CUTS졸업생들의 학위문제가 개혁장로교단(RPCNA)의 제네바대학(Geneva College)의 협력으로 해결되었고, 간하배는 1976년에 제네바대학으로부터 명예문학박사(Litt.D.)학위를 수여받게 된다.

말년의 고통과 사랑
말년에 간하배 부인 도로시 여사가 치매에 걸려 어려움을 겪었다. 필자는 어느 해 여름 방학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방문하였다. 필자 부부는 간하배 선교사 부부와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약속한 터이다. 조금 있으니 도로시 여사가 운전하고 간하배 선교사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조그마한 차가 학교 도서관 앞에 선다.
이 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 된다. 치매에 걸린 이가 운전을 하고 그 옆에는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가 앉아 있으니 얼마나 기막힌 정황인가! 그때 필자에 들려준 말을 기억한다. “나보다 저 사람이 먼저 가야하는데 내가 먼저가면 누가 저 사람을 돌봐줄까?”한 지아비의 처절한 고백이다.

그때 그는 시력을 거의 잃어 앞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고, 전립선암이 재발되어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는 1997년에 정년보다 일찍 조기은퇴를 하였다. 병든 아내를 돌보기위해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직을 내어놓았다. “지금까지는 내가 학문과 신학교를 위해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나의 아내와 가족을 위해 살아야 겠다”고 하였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가까이 지냈던 필자였고, 그의 연구실에는 필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붙어 있어 ‘한국의 친구’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하였다. 또 필자의 아내와 큰 딸이 2대에 걸쳐 그의 제자였으니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살아왔다.
1999년 8월 28일, 신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Wyndmoor의 Keystone 호스피스 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난 몇년 후 도로시 여사도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들에게는 베드와 안드레 쌍둥이를 비롯한 5명의 자녀들이 있다.

선지자적 삶을 살아가며 신앙과 학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Harvie M.Conn(간하배)선교사의 향기는 오늘도 우리 곁에 있다. 비록 그는 갔으나 주옥같은 그의 저서와 글들은 ‘한국을 사랑한 교수 선교사’를 기억하게 한다.

*선교타임즈 2013.11월호. http://missiontimes.co.kr/?p=3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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