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5:13-23 / 다윗이 도망갈 때 함께 했던 이들..
2016.08.08. 월
13 - 16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도망가다.
17 - 23 다윗은 따르는 무리와 함께 광야로 가다.
24 - 29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다.
30 - 37 다윗이 후새에게 계략을 말하고 예루살렘으로 보내다.
1. 내용주해
1)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도망가다.
압살롬의 계획은 치밀했다.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왕에게 판결을 받으려고 오는 억울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친절을 베풀었다. 그런 후 드디어 압살롬은 다윗에게 제사를 명목으로 수행원 200명과 함께 헤브론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압살롬의 계략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 겉보기에는 그들이 거사에 동참한 것처럼 보인다. 압살롬은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것을 전국에 선포하게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의 계략가이며 다윗의 참모였던 아히도벨을 자신의 모사로 세웠다.
*아히도벨 : 길로 사람 엘리암의 아버지이자 밧세바의 조부이다. 다윗의 모사로서 그의 지략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 대등하게 여길 정도로 뛰어났다(16:23). 하지만 그는 압살롬의 편에 서서 다윗을 무너뜨릴 방법들을 조언한다. 1)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을 취하여 다윗과 완전하게 결별했다는 것을 알리게 한다. 그래야 그의 부하들이 확실하게 압살롬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2) 다윗이 도망가고 있을 때, 자신이 직접 만이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치겠다고 한다. 후새의 반대 계획이 없었다면 다윗이 위험할 뻔했다. 결국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 목을 매고 자결한다(17:23). 그가 압살롬의 편에 섰던 것은 아마 밧세바의 가정을 파괴한 다윗을 복수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윗은 서둘러 예루살렘을 피한다. 왕궁에는 후궁 열망만 남겨놓고 모든 가족들을 이끌고 떠난 것이다.
2) 다윗은 따르는 무리와 함께 광야로 가다.
- 다윗과 함께 따르는 무리들 속에는 외국인들도 있었다. 블레셋 가드 군인 600명과 그의 지휘관 잇대이다. 다윗은 그들에게 정처 없이 떠도는 자신보다는 돌아가서 새 왕을 섬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잇대는 다윗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주님께서는 확실히 살아계시고 임금님께서도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만, 그럴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살든지 죽든지, 이 종도 따라가겠습니다.”(21절) 참으로 충성스런 신하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알고 그의 백성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인 것이다. 혈족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사람들 보다 훨씬 낫다.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이 잇대와 동일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보면서 밀려오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서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3)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다.
- 또한 다윗의 무리들과 함께 언약궤도 따라왔다. 사독이 이끄는 레위 사람들이 언약궤를 메고 온 것이다. 잠시 벳베르학에서 쉬고 있을 때 그것을 본 다윗은 사독에게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에 있던 원래 자리에 되돌릴 것을 명령한다. 다윗에게 있어서 언약궤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사울이 블레셋과 싸울 때 언약궤를 가지고 갔다고 결국 빼앗기고 말았다. 언약궤는 승리를 보장해주는 매직이 아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일 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 자체이다. 다윗이 말했듯이 “주님께서 싫어하시면”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바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26). 결국 언약궤를 통해 주님의 뜻을 돌이키기 보다는 주님의 뜻에 맡기고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 그리고 사독에게 아비아달과 그 둘의 아들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과 함께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정황을 파악하고 연약을 취해줄 것을 부탁한다.
4) 다윗이 후새에게 계략을 말하고 예루살렘으로 보내다.
-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슬픔 속에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떠났다.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당한 후 머리에 재를 끼얹고 색동 소매 긴 옷을 찢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 재로 울부짖었던 것과 같은 비애가 있다. 그만큼 현재 상황이 무기력하면서도 지난 날 간음과 살인죄를 범한 일이 못내 가슴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다윗이 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지혜롭게 대처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그녀에게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부모였다. 이제는 자신이 그녀의 고통 속에 있다.
- 압살롬 곁에 아히도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인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무력하게 해 달라고 말이다. 자신은 무력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모략에서 구해주실 분이다. 이제야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고 결국 하나님을 다시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대처한다. 그 순간 만난 사람이 그의 친구 후새이다. 아히도벨의 계략을 깨뜨릴 사람이 후새라고 판단했다.
- 후새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가짜로 압살롬 편에 서도록 꾸민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는 그와 함께하는 사독과 아비아달 그리고 그의 아들들이 있다는 것을 알린다. 그는 충실하게 아히도벨의 계략에 맞서 다른 계략으로 압살롬을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의 뜻을 따르게 한다. 결국 그로 인해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하게 된다.
2. 적용
1) 무관심하고 무기력한 아버지, 갈등과 대립하는 가족
- 압살롬의 반역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하나님의 경륜이야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지만 최소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딸 다말이 오빠로부터 강간당했을 때, 아버지가 나서서 대처했더라면 압살롬이 직접 살인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최소한 압살롬이 돌아왔을 때 그를 징계하고 용서했더라면 아버지를 신뢰했을 텐데. 어쩌면 다윗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자처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 우리 자녀들이 싸울 때, 그대로 방치할 것인가. 알아서 서로 ‘공의’를 행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그것이 공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아버지가 적극 개입하여 옳고 그름을 그들 스스로 판단하도록 조정해야 한다. 그리고 과한 행동은 벌하고 서로 잘 못한 행동은 사과하도록 해야 한다. 그 과정에 서로 앙금이 남지 않도록 충분히 듣고 말하게 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어렸을 때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그 이전 세대에 더 심했을 것이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좋은 경험과 지혜가 쌓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집만 쌓인다. 그래서인지 우리 주변에 나이 드신 분들이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우리는 부모로서 어떻게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준거하여 행동할 것인지 가르쳐야한다. 그 이전에 부모된 우리가 먼저 배우고 다듬어야 할 것이다.
2) 종교적인 헌신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해복하는 것
- 다윗이 보인 행동은 어떻게 보면 체념한 듯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들의 반란을 피해 도망하는 것만이 상책인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그는 그런 현실을 받아드린다. 밧세바 사건이후 나난 선지자를 통해서 전달받은 형벌이 지금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언약궤를 들고 가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언약궤는 단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일 뿐이다. 삼하7장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천막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어느 곳에 있던지 신실한 다윗과 함께 있었다. 신실하지 못한 사울은 언약궤를 가지고 블레셋과 전쟁했다. 하지만 그것이 승리를 보장해 주지 않았다. 진정한 승리는 하나님과 신뢰를 회복하는 데서 시작한다. 다윗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언약궤를 곁에 두는 것 보다는 하나님과 직접 신뢰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달려있었다. 언약궤를 통해서 상황을 역전시키려는 자신의 의도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모든 상황을 맡겨드리려고 한 것이다.
- 우리는 죄를 짓고 그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드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긴다면 아버지의 징계는 사랑의 표징이다. 억울하다고 생각해서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애를 쓰다보면 하나님의 마음과 어긋나기 일쑤이다. 액땜하듯이 상황을 넘기거나 아니면 더욱 많은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노를 달래려고 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우상숭배나 다름없다. 겸허히 받아드리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죄가 용서 받았다. 현재 우리가 짓는 죄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돌이키고 떼어내야 하는 삶의 훈련이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행동이 잘 못된 것이라고 뉘우치고 그런 행동으로부터 돌이키려고 애를 쓸 때, 함께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도와 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죄의 돌이킴은 개인적인 것 보다는 공동체 적인 성격이 강하다.
3) 함께 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받아드리기
- 다윗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킬 때, 그와 마음을 같이하는 동역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방인 군 지휘관이었던 잇대, 사독과 아비아달과 그의 아들들, 후새, 그리고 이름 없는 부하들과 백성들이다. 죄의 고백과 더불어 그 것을 돌이키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함께 할 수 있는 동역자들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죄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나 혼자 감당하려고 한다. 미숙하기에 힘들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동체, 즉 교회를 주셨다. 야고보5:14~15에서 병든 사람을 위해 장로를 초청하여 기도하라고 하면서, 병이 회복될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용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 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것을 솔직하게 나누고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가 있는가? 만약 없다면 내가 교회 안에서 나를 오픈하기를 꺼려하고 있지 않는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있지 않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함께 할 수 있는 진실한 공동체를 만들어 보라. 교회에 가정교회가 있다면 그런 공동체가 되도록 애써 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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