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2:1-15 / 다윗이 죄를 깨닫다.
2016.7.31. 주일
1 - 4 나단이 다윗에게 비유로 말한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양 이야기
5 - 12 부자에 대한 다윗의 판결과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
13 – 15 다윗의 회개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판결
1. 내용주해
1) 나단이 다윗에게 비유로 말한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양 이야기
- 다윗은 그 엄청난 악행은 계속 숨길 수 있다고 판단했을까? 언젠가 밝혀질 것이라 생각했을지라도 지금은 음욕에 대한 욕구가 더 커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계속 그의 악행을 감추려한다면 또 다시 무고한 사람들만이 희생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셨고 이상 지켜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직접적으로 악행을 지적하지 않으시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다윗이 어떤 잘 못을 저질렀는지 스스로 깨닫고 또한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악행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 한 성읍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는 없었다. 그는 그 암양을 가족처럼 대했다. 그의 딸처럼 함께 먹고 잤다. 그렇게 애지중지한 암양을 그 부자에게 빼앗겼다. 그것도 그 부자에게 찾아온 손님을 접대해야 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부자는 자신이 소유한 그 많은 양과 소를 아까워하면서 가난한 이의 어린 암양을 빼앗았던 것이다.
2) 다윗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
- 다윗은 이야기를 듣고 부자에 대해 몹시 언짢아하고 매우 분노한다. 왜 언짢았을까? 그 이전이라면 몰라도 자신이 왕이 된 지금 그의 통치 하에 있는 백성들이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랬을까. 그런 악행을 저질은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라고 선언한다. 한마디로 죽일 놈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사울이 요나단에게 다윗에 대해 했던 말과 같다(삼상20:31). 그 말이 실제로 자신에게 되돌아 올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새롭게 시작한 나라에서 정작 백성들보다는 자신이 그런 악행을 저질은 당사자가 되였다. 다윗은 그 선언과 함께 율법에 의거해서 네 배로 배상해 주어야한다(출22:1)고 판결한다.
- 자신이 그렇게 판결했기 때문에 더 이상 변병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과정이 없이 직접 다윗에게 죄를 지적했다면, 지금까지 행동으로 봐서 아마도 거의 백 프로 부인하거나 나단을 제거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죄를 고백할 수밖에 없는 기회를 베푸신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나단은 바로 다윗에게 그 부자가 다윗이라고 말하고 그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지 언급한다. 그가 그 이야기의 부자처럼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대신해서 세웠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사울의 왕궁과 심지어는 후궁까지 주셨고 온 나라도 다스리도록 맡기셨다. 덧붙여서 부족하다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그에게 더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은혜를 입은 왕이 남편이 있는 여인과 간통하였고 충성스런 부하를 죽였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9절), 무시하였기(10절) 때문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 그러면서 그의 악행, 즉 살인과 간통에 대한 벌로 다윗의 집 안에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며 아내들이 빼앗기고 욕보일 것이라고 판결한다. 이러한 일을 은밀하게 진행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3) 다윗의 회개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판결
-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다윗으로 하여금 죄를 즉각적으로 시인하게 했다. 이러 저리 변명거리를 늘어놓았던 사울과 사뭇 대조적이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의 벌을 내리시기 보다는 용서의 은혜를 베푸신다. 살인죄를 지은 당사자는 죽임에 처해야하나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밧세바가 임신한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다윗을 대신하여 어린 생명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다윗이 그토록 소중했다는 것인가? 아마도 삼하7장에서 하나님이 다윗과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분의 마음이야 얼마나 속상했겠는가.
- 하나님은 14절에서 다윗이 “주님의 원수들에게 우리를 비방할 빌미를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다윗의 악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존엄이 크게 손상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2. 적용
1) 쉽게 시인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강팍함
- 누군가가 내 잘 못을 지적하면 잘 못된 행동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그리고 지적질 당한 그런 상황이 언짢아 지면서 이리 저리 변명하여 피하려고 한다. 그리고 지적질 하는 상대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설령 내가 잘 못했다고 해도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사실 누군가가 잘 못을 지적할 때 이미 상대는 기분이 언짢아 있는 상태이다. 그러기에 공손하고 유하게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지적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잘 못했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내 잘 못을 지적했을 때, 그 잘 못된 행동에 곧장 눈을 돌렸으면 한다. 변명할 것 없이, 지적질 하는 사람 태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것 없이 내 잘 못을 우선적으로 시인하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내가 잘 못을 저질렀을 때, 가장 속상해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누구든지 나의 죄를 지적할 때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다면 좀 더 자세히 적극적으로 들을 것이다. 우리는 사울과 다윗의 태도에 대해 극명한 대조를 보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따라 하나님도 마음이 달라질 것이다.
2) 나라고 다를 것이 없음
- 누구가의 잘 못을 보면 너무 쉽게 판단한다. 그 만큼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안의 들보는 안보이고 상대의 티끌이 더 잘 보인다. 상대방의 티끌이 보이면 내 안에 그와 같은 들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다윗이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치며 그 부자에게 분노하는 장면에 왠지 웃음이 나온다. 왜냐하면 다윗의 행동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떨어져서 3자의 입장에서 보니까 나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런 마음이 아닐까.
- 그렇다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행들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잘 못을 볼 때, 반면교사에만 그쳐야하는가? 그저 ‘나나 잘해야지’라고만 생각하고 자기성찰에만 만족해야하는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책임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인간됨으로서의 윤리적인 책임이다. 그래야 사회가 유지되니까. 함께 살아가는 가까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책임의 짐을 서로 나눠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이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좋은 일이다. 그것은 공동체에 합의된 공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 공의에 대한 합의된 규정을 잘 지키는지 서로가 감시하고 판단해 주어야한다. 나단은 단지 다윗의 판단과 그의 분노의 기준을 다윗 자신에게 돌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고 있다. 다윗이 그 당시 사회적 기준인 율법을 대신해서 그 부자는 죽일 놈이라고 판결했다. 그 죽일 놈이 자신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겠지만 다윗은 죄를 시인하고 자신의 판결에 복종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판결을 적용할 때 당사자인 다윗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신다. 이런 메커니즘이 잘 적용되는 사회가 건강하다.
- 여러 영역의 합의된 규정은 다윗시대에는 율법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라의 시민으로서 헌법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경이 그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라의 헌법과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 속에 잘 적용되도록 서로 책임을 지는 ‘시민의식’이 요구된다.
3) 나의 행동은 하나님의 명예와 직결됨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정말 ‘믿음’ 좋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나라에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나라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메시아(왕의 의미)로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이다. 우리는 그의 백성으로 거듭나서 자라가며 어른이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 자라간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이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예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바울은 예수님과 연합된 한 몸의 지체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연합의 관계는 내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그분이 내 안에서 살고 계시고 그러기에 나의 삶은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된다. 그 믿음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내 삶의 행동하나하나가 예수님의 명예와 직결됩니다. 내가 죄를 저질렀을 때, 나만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욕을 먹게 된다. 다윗이 죄를 범했을 때, 나단은 “주님의 원수들에게 우리를 비방할 빌미를 주셨다(삼하12:14)”고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원수가 누구겠는가? 주님의 나라를 계속 침탈하려고 하는 사탄이다. 나단의 말은 다윗의 악행으로 인해 사탄은 주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다윗을 옹호하지 못하도록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지 말자.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라이즈업 대표의 성적 범죄는 그가 아무리 잘 못을 인정하고 앞으로 자숙하며 살겠다고 하더라고 이미 주님의 이름이 더렵혀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교계에 왜 이런 일이 되풀이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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