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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사유에 관해서 ...

교회에 관한 생각들

by Sungmin Kim 2015. 1. 1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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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묵상하다가

최규창 형제의 페북에서 퍼온 글 2015.01.11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모든 사람은 자기 생긴 대로 살 권리가 있다. 매일 기도와 말씀 보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의지를 발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 년 초에 계획을 세우지만 1월을 넘기지 못하고 일상 속으로 휩쓸려가 버리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의지도 한계가 있는 것이지, 젊은 시절부터 열 번을 넘게 실패한 일은 의지만으로는 변화되기 힘든 법이다. 그럼 그런 사람에게는 신앙의 성장이나 인격의 변화란 요원한 것인가.

나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으신다고 믿는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든 우리는 모두 자녀가 되었다. 사람마다 신앙의 컬러가 다르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과 방식이 다르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엉망으로 하는 사람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동일하다. 그 분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앙의 훈련과 경건한 삶을 잘 살아간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동일하게 대우하신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진다면 ...그는 결국, 탕자의 형이나 포도원에 일하러 먼저 들어온 사람들처럼, 경건을 제대로 훈련한 것이 아니므로 미숙한 사람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아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의 태도는 매우 성숙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무차별성에는 아무런 이의제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덫에 다 빠져버린 셈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1:1로만 살아간다면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 살아가든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 곁에 항상 타인들이 있고, 인간이 항상 사회를 이루고 산다는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타인들에 대해 어떤 의무를 가지게 된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는 일정부분 제약된다. 그 제약의 방식은 바로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대를 거부하는 것이자 하나님의 인내의 마지막 경계에 서 있는 행위다.

누가복음 14장에서 큰 잔치를 베푼 주인의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의 핑계를 보라. '밭을 사야 한다.', '새로 산 소를 시험해야 한다.', '장가갔으니 집에 가야 한다'... 큰 잔치를 배설하고 당일 날 초대하는 사람은 없으니 아마도 주인은 오래 전에 이들을 초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일 날 종들을 보내어 오라고 부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핑계가 정말 '아무 생각이 없다.' 유대인의 큰 잔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저녁에 있을 터인데, 밭을 사고, 소를 시험하는 것은 모두 낮에 하는 행위들이다. 장가 갔으니 잔치에 못 가겠다고 하는 것은 더 말이 안 된다. 그것과 이것이 무슨 상관인가. 결국 그들은 그냥 잔치에 가기가 싫은 것이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둘러대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이 이야기를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비유해서 그 초대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더 강조한다. 주인은 분노하여 급기야 처음 초대한 이들을 모두 포기하고 길거리에 나가 병자들과 나그네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채울 것을 명령한다. 초대 받은 이들은 그 잔치의 의미와, 거부의 결과를 '생각했어야' 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넓고도 넓은 수용의 범주에 조차 들지 못하는 이들이 되어 버렸다.

아렌트의 말처럼 인간은 사유함으로써 차별화된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무의식의 원형과 본능에 사로잡히게 되고 타인들과 살아갈 권리를 잃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도 거부하게 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과 그에 대한 유대 사회의 반응, 자기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 공격을 보면서 사유의 포기가 가져오는 비이성적 재앙의 실체를 경험한다. 인간의 책임은 사유에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고 훈련하고 반성하는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다. 우리는 사유를 통해 타인의 내러티브로 들어가고 그 속에서 그와의 동일시를 경험하고 다시 나의 내러티브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공통된 내러티브가 없이 타인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결국 같은 일을 당해본 사람만이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부모님 생각을 잘 안하는 사람이 <국제시장>을 보고 나서는 부모님께 전화를 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영화는 내러티브를 강제로 주입하는 도구다. 그래서 시각적 연상에 의한 임팩트가 강하지만 순수한 사유를 통해 상상하는 내러티브에 비해 효과가 현격히 짧다. 결국 성서는 (그것이 팩트이건 상징이건) 과거의 서사와 내러티브를 통해 우리들이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위한 '사유'를 돕는 텍스트다. 거기서 그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말씀과의 만남은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타인들과 공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텍스트로서의 말씀을 주실 이유도 없다. 결국 우리가 말씀을 통해 깨달아 가는 것은, 우리는 모두 그 분 앞에서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는 동일한 존재들이라는 것과, 우리가 타인을 위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이상 그 분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리라는 점이다. 그 분을 더 알아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처음 잔치에 초대된, 소를 사고 밭을 사는 부자들이 아니라, 나중에 초대 받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장애인, 길모퉁이나 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나그네들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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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하나님을 깊이 사유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의 창시자오 완결자인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 복음의 출발점이요 지속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서 자신의 신앙의 네러티브를 만들어 간다. 앵무새처럼 반복된 교리의 암기가 아니라 복음이 주는 다양하고도 감동적인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생성된다. 이를 통해서 다양하지만 비슷한 삶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의 삶처럼 느껴지고 그들의 현실과 아픔까지도 공감할 수 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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