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겨자씨에 대한 비유

교회에 관한 생각들

by Sungmin Kim 2010. 12. 4. 01:18

본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고 이 씨앗은 자라나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겨자씨는 작은 것에 대명사이다. 또한 겨자나물은 유대지방에 천박하게 널려있는 잡초에 불과하다. 그런 작고 천박하게 취급된 잡초(푸성귀)가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논리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천국이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구약에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이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 발전되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건국신화의 영웅도 아니다. 그저 바벨론지역의 이방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던 평번한 인물이다. 그 여정도 보면 실수 투성이다. 이집트에서 아내를 팔아 생명을 부지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할 때 갈릴리 어촌지역에서 12명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시작하셨다. 잘 아는 것 처럼 그들 중에는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도 있었고 한국사회에 있었더라면 좌파 빨갱이라고 취급받을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바로 겨자씨이다. 하지만 하찮게 보이고 약해 보이는 변두리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 나라의 나무로 자라날 것이라고 이야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겨자씨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흙속에 썩어짐이 있어야 한다. 그 씨가 썩지 않고는 생명이 잉태될 수 없다. 썩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 속에 생명이 없다는 말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증거로 십자가에 죽으셨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또한 믿음의 도약이 있어야한다. 믿음은 나물이 나무가 되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도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마치 어느 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과 같은 정체성의 변화를 겪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하지만 아직도 세속의 기준과 가치 속에서 속된 삶과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롯유다를 가르켜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그 안타까움을 엿볼 수 있다.

썩어짐과 믿음의 도약이 있는 사람들,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권력과 부가 있는 사람들보다는 아주 천하고 약해 보이는 변두리의 사람들이 겨자씨가 될 확률이 높다. 겨자씨 특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과 부가 있더라고 자신을 작게 여기고 변두리의 어떤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도 겨자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자랑할 것 없는 사람들, 자신의 무지와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래서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서로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서로 돕고자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기대하며 시도하려는 열정을 품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복음의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

이런 교회는 하나님의 성품인 선교적인 하나님(Missio Dei)를 닮은 이미 선교적인 교회(Missional Church)이다.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