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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교회에 관한 생각들/신학

by Sungmin Kim 2016. 9. 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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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The Heidelberg Catechism A.D. 1563)

 


1)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역사적 배경.

 

① 교리문답서 전의 역사적 배경

 

본 교리문답서는 독일 지역에서 만들어진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이다.

 

독일은 이미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신앙을 받아 들였던 지역으로서 활발하게 종교개혁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1540년을 접어들면서 하이델베르그에서는 새로운 신앙의 모습이 제시되고 있었다. 그것은 1546년 프레데릭 2세에 의해서 좀더 바른 신앙의 모습을 세우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프레데릭 2세는 멜랑히톤을 초빙해서 신학 교수로 세우고자 했으나 멜랑히톤이 이를 거절하고 단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는 정도에 머물렀다. 그러나 멜랑히톤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프레데릭에게 끼쳤으며, 그 결과 멜랑히톤의 신학적 사고처럼 하이델베르그에서는 루터주의와 칼빈주의의 신학을 조화 시켜려는 모습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루터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가 교리적인 기초로 제시되었으며, 또한 예배의식에는 쯔빙글리의 방식이 채용되었다.

 

그리고 16세기의 정치적 혼란으로 하이델베르그에 칼빈주의 자들이 속속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하이델베르그에는 루터파와 칼빈파와 쯔빙글리파가 혼합되어 발전되는 양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공재설"에 대한 입장 표명에 따라서 각 분파가 심하게 충돌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바로 이런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사람이 프레드릭 3세(Frederick Ⅲ)였던 것이다. 그는 각 교파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칼빈주의 신학정신에 많은 호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신학적인 혼란을 제거하고 또한 후손들의 건전한 종교교육에 건전한 기초가 될 수 있는 신앙교육서를 제정하고자 하는 작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처럼 독일의 선제후인 프레드릭 3세(Frederick Ⅲ)의 명령에 의하여,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인 우르시누스(Zacharius Ursinus)와 궁정 설교자인 올리비아누스(Caspar Olevianus)에게 본 요리문답을 작성하도록 제시했던 것이다.

 

② 교리문답서 제정과 채택의 결과

 

프레데릭은 1562년 12월에 이 요리문답서를 수정하여 승인 받기 위해서 주요 목사들과 교수들의 총회에 이 작업을 위임했다. 그 결과 1563년 초에 "팔라티네이트 선거후의 지역에 있는 교회와 학교에서 가르칠 요리문답, 또는 기독교 교훈집"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문답서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뽑아 낸 우리 기독교의 요약된 교훈서, 또는 요리문답서이므로 이후 교회와 학교에서는 다음 세대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를 바란다라고 서문에 간략하게 자신의 입장을 제시해 주므로 이 요리문답서가 당시 개혁교회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1600년에 있었던 국가 종교회의에서는 이 요리문답을 교회의 통일된 교리 규범의 하나로서 채택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교회의 책임자는 이에 서명하고 모든 목사는 교회에서 이 요리문답을 설명해 주는 것을 의무화하도록 규정하기도 했다. 또한 이것은 1618-1619년 도르트회의 때에도 중요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ex-알미니우스 정죄, 칼빈주의 5대교리 제정)

 

그리고 본 신앙고백서의 가치는 화란 개혁파 교회에서는 이것을 청소년 신앙 교육을 위해서 사용하기도 했으며, 주일 저녁 설교로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1568년에서 1571년까지는 화란의 개혁 교회와 라인강 하류 지방과 헝가리, 체코, 폴란드에 있는 개혁 교회가 이것을 사용했으며 이것은 1609년 미국 땅에 나타난 최초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이기도 하다.

 

특별히 본 신앙고백서는 역사적인 독특성이 충분히 이해되면 더욱 본 조항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즉 프레드릭(Frederick)은 본 신앙고백서를 인준함으로 인해서 1566년 5월14일 고소를 당하였으며, 이단으로 제소되는 위기에 당면하게 되어 개혁주의 신앙으로부터 돌아설 것과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프레드릭(Frederick)은 물러나지 않고 진지하게 황제 (멕시말라2세)MaximillaⅡ세와 루터주의자들 앞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신앙고백의 목적과 원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양심을 거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왕관을 벗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담대하게 외쳤던 것이다. 또한 그는 계속해서 이 요리문답이 모두 성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도저히 반증할 수 없는 성경적 근거들을 들어 반박했으며, 이 일에서 이 보다 더 성경적인 것을 보여주는 자가 있다면 기꺼이 하나님의 진리에 따르겠다고 외쳤던 것이다. 결국 이런 프레데릭의 강경한 바른 신앙에 대한 정신의 확립으로 인해서 후에 그는 루터파와 황제에게서까지도 '경건한 프레데릭'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위기를 벗어나는 중요한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프레데릭에게 가장 어려움을 준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루터파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파 신앙의 독특한 역사적인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루터파에게 있어서 조차도 이 요리문답의 신앙적 정신은 자신의 신앙과 일치시킬 수 없는 이단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이런 신조의 역사를 통해서 왜 역사적 개혁교회가 루터주의자들과 함께 할 수 없는지를 알게 된다. 즉 루터주의도 결국에는 개혁신앙과 교리적인 핵심 부분에서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의 내용이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에 의해 이단시 된 이유

이처럼 역사적으로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에게 이단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요리문답을 개혁교회에서는 당시 전체적으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개혁파 신앙이 일반 비(非)개혁신앙과 얼마나 다른 신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요리문답은 프레데릭의 장남인 "루이 6세"(루터주의자)에 의해서 큰 수난을 당하게 된다. 즉 이 요리문답을 작성한 자들을 추방하고 또한 요리문답의 배포금지와 불태움을 입는 수난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요리문답이 출판된 이후에는 이른바 이 요리문답의 성격이 쯔빙글리적, 또는 칼빈주의적 이단이라는 이유 때문에 엄격한 루터파에게 극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로마 카톨릭파에게도 미사제도를 우상숭배라고 정죄한 제 8문 때문에 많은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성찬의 문제에 대한 서로의 입장이 달랐다.)

 

이런 역사적인 수난의 과정 속에서 본 요리문답의 개혁 신앙적인 정신의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즉 우르시누스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서 자신이 제정한 요리문답서를 옹호하기 위해서 변호서를 작성하기도 했으며 또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석을 출판하여 개혁신앙의 독특성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책들은 루터주의 자들로부터 비난들과 오해들에 대한 대답하는 형식이지만, 오히려 그 대답에서 루터주의와 구별된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들을 더욱 분명하게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본 요리문답은 루터주의와 카톨릭과 구별되는 철저한 개혁주의적 성격을 분명히 제시했던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본 신앙고백서는 당시의 개혁교회 신앙인들에게는 단순히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깊이 연결된 실천적인 삶에서의 고백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레드릭(Fredrick) Ⅲ세가 이 요리문답이 의도하는 바가 3가지임을 밝히고 있는 글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먼저 교리적 가르침의 틀을 제공하고, 설교의 지침을 마련하며, 단일한 고백서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계속해서 "만일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생의 초기에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교육받게 되면, 그것은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공적 도덕과 사적 도덕, 그리고 세속적 문제와 영원한 문제에 대한 개혁을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시리라는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서 이에 따라서 가르치고, 행동하며, 살도록 해야 한다"라고 그 목적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나 무엇보다도 본 신앙고백서의 작성 목적의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 내에서 로마 카톨릭과 루터파와 개혁파속에서 철저한 '성경적인 요리문답'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 개혁주의적 특성으로서 중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교리적 특징.

 

① 3 구조의 본문.

특별히 그 구조에 있어서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그리고 성례를 3구조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칼빈의 제네바 2차 교리문답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구조를 다시 3구조로 다음과 같이 분류되어 있다. 첫째는 비참, 둘째는 구원, 셋째는 감사로 나뉘어져 있다.

 

이런 3구조는 칼빈의 제네바 2차 교리교육서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 구조에 있어서 십계명을 사도신경의 뒤에 둠으로 인해서 복음과 율법의 깊은 신학적 이해를 살펴보았듯이 본 요리문답서에서도 이런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본 요리문답서는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마지막 부분인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설명하는 '감사' 부분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율법에 대한 감사의 접근 방식은 이 요리문답을 해설한 우르시누스 자신에 의해서 더욱 깊은 신학적 이해를 제시해 주고 있다.그는 성도의 삶의 규범으로 율법을 따라서 사는 삶의 최종적인 목적이 인간 자신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예와 영광을 지향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영예는 영광은 사랑, 존경, 순종, 그리고 감사를 포함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존경, 그리고 순종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며, 우리가 받은 혜택으로 인해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 우리 행위는 자신에게 돌려지는 칭찬과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해야 함이 필연적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② 1문의 독특성

 

1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제 1문 :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

 

답 : 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십니다. 실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1문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위로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으며 그에 대한 대답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 또한 이제는 그분을 위하여 사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위로임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1)라고 제시하면서 인간의 본질적인 자리를 제시해 주고 있는 정신과 동일한 정신을 표현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인간의 궁극적인 비참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면 그 본질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③ "칼빈주의 신학 '밖에서'(Extra Calvinisticum)"의 특징.

 

칼빈주의 신학 밖에서(Extra Calvinisticum)는 개혁신앙에 있어서 개혁파 신학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totus)과 인성(totum)에 대한 개혁신학의 독특한 이해이다. 이 주제는 루터주의와 분리되게 되는 성만찬 논쟁의 핵심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먼저 본 요리문답에서는 다음과 같이 본문이 제시되고 있다.

 

제47문 :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요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인간적인 본성으로는 지금 이 땅 위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그의 영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제48문: 만일 신성이 있는 모든 곳에 인성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불가해하고 어디에나 현존하기 때문에, 그 취한 인성 외부에 있을지라도, 그 안에 있어서도 인격적으로 인성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루터주의가 "공재설"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의미를 심각하게 파괴하고 결국에는 그리스도 자체를 곡해하는 위험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배격한 개혁신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루터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예수의 신성의 속성들을 공유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인간성이 편재, 전능, 전지와 같은 속성들을 가지셨다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루터파의 기독론에 이해는 성만찬론에 있어서 예수께서 신체적으로 떡에 현존한다는 자신들의 공재설에 있어서 근본적인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신적 속성은 예수의 인간성으로 전달되는 빵과 포도주의 각 요소 "안에, 그와 함께, 그 아래"에 그리스도께서 "신체적으로 현존"하실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고대 신조인 칼케톤 신조에서 확립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구조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제시를 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지만 그의 신성은 계속해서 참되고 진정한 신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거나 혼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 안에서 연합한다고 제시했던 것이다.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인성은 신성으로 변화하거나 신성과 혼합되지 않고 인성은 언제나 인성으로 남아 있음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성은 언제나 신성으로 남아 있음을 함께 제시했다. 즉 창조자와 피조물의 그 근본적인 구별은 성육신에 의해서도 변경되지 않는 것이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인격적으로 연합된 것임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결국 신성은 인성의 밖에서도 그리고 그 안에서도 존재하는 것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성만찬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체적으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하늘로 들려 올려져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인성과 실제적인 연합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신비적인 연합"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④ 제 3판의 "80문"의 특징.

 

1563년 판에는 로마 교회의 미사제도를 "우상숭배"라고 선언한 80문이 초판과 재판과 다르게 제시되고 있음이 큰 특징으로 제시되고 있다. 즉 초판에서는 빠져 있고, 재판에서는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 3판에서는 그 전체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1563년 12월 4일에 트랜트 회의 끝난 후에 로마 교회의 "저주문"에 대한 프레데릭의 강력한 저항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내용으로 인해서 프레데릭은 더 많은 어려움에 처하기 했었던 역사적인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80문 : 성만찬은 로마 카톨릭의 미사와 어떻게 다릅니까?

 

답 : 성만찬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통해서 우리 죄가 완전히 용서받았다는 선언입니다. 또한 그것은 성령께서, 하늘 아버지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연합케 하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미사는 그리스도의 몸이 사제들에 의하여 날마다 산자들과 죽은 자들을 위하여 드려지지 않는다면 그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는 사죄를 얻지 못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나타나셔서 그곳에서 그리스도가 경배를 받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저주받을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80문에 입장을 대부분 비(非)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개혁주의 분파 안에서조차 이 항목에 당시 프레데릭의 입장을 매우 과격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 예로 필립 샤프도 "제80문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속에 일관되어 있는 화해 무드를 해치고 악을 악으로 갚음으로써 비프로테스탄트적이고 비복음주의적인 배타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불필요한 지나친 적대감 때문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로마 교회의 규율을 따르던 선거 후 챨스 필립이 1719년에 사용 금지령을 내리게 하고 말았다"라고 지적하면서 이 80문의 정신이 매우 과격하고 포용심이 없는 것으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오늘날 엄밀한 개혁신앙을 회복해 가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좀더 세심한 주의를 갖게 한다. 왜냐하면 과연 이들의 평가처럼 80문의 성격이 과연 그런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개혁신앙을 고집해 왔던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런 입장이 바른 성경적인 신앙을 지켜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고 또한 정당한 것임을 확증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오늘날 신앙고백서를 평가하는 정신이 얼마나 느슨해져 있고 또한 타협적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이 성경적인 바른 신앙에 대한 엄격한 표현은 성경의 참된 진리를 더욱 바르게 지킬 수 있었으며 또한 후손들에게도 정확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지침이 되었음을 우리는 후대의 신앙고백서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그의 이런 분명한 입장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그대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25장 6절에서 "교회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머리가 없으며, 로마 교황도 어떤 의미로나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고, 교회 내에서 자기를 높여 그리스도에 대적하며,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에 대적하는 저 적그스리스도며 저 죄의 사람이며 멸망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고 있고 또한 29장 2절과 3절에서 "로마 카톨릭에서 행하는 미사의 제사는 피택자들의 모든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드린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제사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이 주장은(화체설) 성례의 본질을 뒤집는 생각이며 이제까지 여러 가지 미신과 난잡한 우상 숭배의 원인이 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웨스트민스터에서도 로마 카톨릭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평가하고 이 분파와는 절대로 교리적으로 일치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참된 정신을 명확히 하고 또한 바르게 정립하고자 하는 정신을 '과격하다'거나 또는 '극단적이다'라고 한다면 성경적인 진리를 파괴시켜 가면서도 포용과 연합으로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행위는 도대체 어떤 행위인지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80문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사람들 중에서 알미니안주의 자들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들은 16세기초에 이 요리문답이 성경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수정 작업을 제기하고 나왔다. 그러나 이 수정 작업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성경의 참된 정신에 의해서 요리문답의 수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는데 있어서 부딪치는 부분은 모두 삭제하려고 했었던 것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도르트 총회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제거하고 오히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가장 잘 조화된다. 그리고 단순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서 청소년들이 이해하기가 좋을 뿐만 아니라 장년들의 교육에도 매우 유용하다. 그러므로 벨기에 교회에서는 계속해서 이 요리문답을 가르쳐서 교인들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며, 어떠한 모양의 반대도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하이델베르그의 입장이 전통적인 개혁신앙의 바른 정신에 서 있음을 더욱 확고히 정립을 해 놓았다

 

결국 이처럼 성경의 참된 정신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인간의 연합과 일치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면서 인본주의적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정신은 하이델베르그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에서도 위의 조항을 삭제하고 변경시키는 1903년의 신앙고백서 작업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개혁파 신앙의 정립에 있어서 매우 조심해야 할 행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총신대신대원원우회게시판에서 퍼온 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http://kcm.kr/dic_view.php?nid=38351&key=&kword=&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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