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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변론

설교/매일묵상

by Sungmin Kim 2016. 9. 13.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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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0:1-18 / 바울의 변론

2016.09.13.


1 - 6 사도들은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가 있다.

7 - 11 외모로 판단하지 마라.

12 18 사역의 목적은 자랑이 아니라 복음의 확장에 있다.

 

 

1. 내용주해

 

1) 사도들은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가 있다.

 

고린도교인들 중에 어떤 이들이 바울에 대해 이중적이라고 비난했던 것 같다.

직접 대면할 때는 유순해도 편지에는 아주 강경하게 표현하는 것이 거만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글로써 충분하게 권면했다면 만나서까지 강경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비굴한 겁쟁이처럼 비춰졌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가지고 그들을 대했다. ‘타페이노스를 그들은 비굴하다라는 의미로 표현했지만 바울은 겸비하다라는 뜻의 긍정적인 의미로 바꿔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바울이 육정을 따라서 처신한다고 비난했다. 물론 바울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정을 따라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변론한다. ‘육정사르카의 번역이다. 세상의 철학이나 가치에 자신을 맡기는 이기적인 욕망을 의미한다. 우리는 육정을 이기도록 싸우고 있다. 그 싸움의 무기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다. 그것은 마치 견고한 요새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상의 이론을 파괴할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세상의 이론을 그리스도께로 복종케 할 수 있다. 잠언 21:22에는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 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도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인간의 교만한 지식과 사고를 무너뜨리는 지혜로운 용사이다. 세상의 지식을 무가치하게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지식을 그리스도를 받아드리는 좋은 수단으로 만든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2) 외모로 판단하지 마라.

 

바울은 사람들이 보기에 외소하고 말이 어눌했던 것 같다(10). 아마도 병약한데다가 복음을 위해 고생한 흔적이 몸에 그대로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일부 교인들이 바울을 무시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거짓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이에 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도 또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주님께서 주신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권위를 자랑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거리낄지라도 그 권위는 성도를 세우는 것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다시 방문하게 되면 이들에게 단호하고 강하게 대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3) 사역의 목적은 자랑이 아니라 복음의 확장에 있다.

 

바울을 대적했던 사람들을 직접 언급한다. 그들은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이었다(12).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난 이후 그곳에 와서 복음을 가르쳤던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언변이 화려하고 교인들의 반응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자랑하고 스스로 내세우는 것을 좋아했다. 12절에 보면,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칭찬했던 것 같다. 바울은 그런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일인지 지적한다.

바울도 물론 자랑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하나님께서 정해준 분량대로 사역을 충실히 했고 복음의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고 자랑했다. 거짓 교사들처럼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15)하지 않았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15:20)

사도들 간에 맡은 지역과 사역의 역할이 있었는데, 다른 사도들의 영역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바울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복음을 받아드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자라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만 머물지 않고 그 복음전파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다(15). 그런 목적으로 바울 일행은 고린도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자랑거리이다.

 

바울은 예레미야의 구절을 인용하여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자랑하라고 권면한다. 자랑의 기준은 주님이 되어야한다. 사람의 평가와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 애를 써야한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24)

 

 

2. 적용

 

1) 목회자로서 나는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가?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전투적이어야 한다. 다소 부정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의 영적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냥 유지되지는 않는다. 물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그것은 약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한다. 고린도교회에 와있었던 거짓 교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지 않고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점점 멀어질 뿐이다. 사실 영적인 전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탄은 끊임없이 세상의 철학과 가치를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와 말씀을 무력화시킨다. 교회 밖이야 말할 필요는 없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단지 종교적인 생활에 만족하도록 무장해제 시킨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전신갑주를 입어야하는 영적 싸움이다. 무엇으로 전신갑주를 입듯이 중무장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다. 말씀의 능력이다. 말씀이 우리 안에 생각과 사고를 해체시키고 그분의 인격으로 다시 재결합하는 능력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순종에 달려있다. 말씀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인격으로 우리 삶에 들어날 때, 강력한 능력이 된다. 어떤 사탄의 유혹이 다가오더라도 그것을 간파할 수 있는 지혜와 판단력이 생기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그런 세상의 지혜를 활용하여 그리스도를 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게 된다.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의 삶이 되어야한다.

 

2) 나에게 권위가 있다면 그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목회자로서의 권위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있지 않다. 현실적으로 자연스럽게 주어지기는 한다. 성도들이 성경을 배우면서 가르치는 교사에게 권위를 인정해 준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너무나도 약한 솜 줄에 불과하다. 권위는 우선 하나님으로 온다. 한 공동체를 목양할 경우, 예수님을 대리해서 성도들을 돌보게 될 때 권위가 형성된다. 물론 모든 성도들이 목양자로서 권위를 인정하는 약속이 있어야한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대리한다는 의미는 신적인 권세가 아니다. 그분의 초월적인 권세를 넘볼 수 없다. 대신에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목자로서의 삶과 가르침이다. 그분은 겸손하셨기에 모든 권세를 내려놓고 인간이 되셨다. 그리고 그를 영접한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내어 주셨다. 그분은 온유하셨기에 어떠한 죄인이라도 가까이 오는 이들에게 자신의 팔을 벌리셨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분은 자비하셨기에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셨다.

우리가 그분의 삶을 따른다면 우리 주변에 책임지고 있는 공동체의 목자로서 권위가 견고하게 세워진다. 주님은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목자의 권위에 순종할 마음을 주실 것이다. 목자로서 삶의 핵심적인 목표는 공동체를 온전하게 세우고 그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기에 실제적인 목양에 있어서, 지체들의 죄와 악행이 발견되었을 때는 담대하게 꾸짖고 돌아서게 해야 한다. 때로는 공동체 안에서 가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도 겪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목자에게 대적하는 여러 부정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처럼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권위가 있기에 견고하게 전진해야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것이다.

 

3)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는 무엇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가? 남자들은 인정받는 것을 생명처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정받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된다. 인정받기 위해 스펙을 쌓는다. 외모를 가꾼다. 자기개발을 한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가장 큰 인정은 설교를 잘한다는 것에서 찾을 것이다. 회중 앞에서 멋지게 설교하고 난 이후 교인들이 은혜 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나 우리 목사님은 설교 말씀이 참 좋다고 자랑삼아할 때 크게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일 것이다. 목회자로서 얼마나 보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거짓교사들이 얼마나 언변이 화려했겠는가? 그 당시 사회를 볼 때, 철학과 수사학이 발달하였기에 언변이 논리적이고 유창한 사람들이 많았다. 고린도도 마찬가지로 로마가 세운 계획도시이기에 주변에서 화려한 논쟁자들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설교를 하거나 말씀을 가르칠 때 언변이 좋은 사람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반응에 따라 사역의 성공여부를 가름했을 것이다. 거짓교사들을 그것을 자랑삼아했다.

바울이 자랑삼아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이 온전하게 믿음이 자라나는 것이 그가 사역하는 목적이었다면,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은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를 인정해주고 내세워주시면 그것처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주님의 평가기준이 그것이 아니겠는가? 복음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이 성장하는 것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가? 하나님나라 복음이 이 세상 속에 얼마나 넓게 확장해 나가는가? 이런 것에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비록 내가 약점이 있고 부족한 것이 많아도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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