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바울의 마지막 권면

설교/매일묵상

by Sungmin Kim 2016. 9. 29. 12:47

본문

 고린도후서 13:1-13 / 바울의 마지막 권면

2016.09.19.

1 - 4 세 번째 방문을 계획하다.

5 - 10 바울이 사역하는 목적을 설명하다.

11 13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축복하다.

 

1. 내용주해

1) 세 번째 방문을 계획하다.

 

바울은 세 번째 방문 계획을 말한다. 바울이 두 번째 방문 때 전에 언급했던 죄지은 자들을 꾸짖지 않았던 것 같다(12:21). 하지만 이번에 방문하게 되면 그 사람들뿐 만아니라 그 밖에 죄를 지은 자들에게도 단호하게 초치를 취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냥두지 않겠다(용서하지 않겠다, 개역개정)고 미리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출교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5:5) 초대교회 당시의 관례를 반영하는 조치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애정이 있었기에 사랑과 인내로 그들을 온유하게 대했지만 반면에 죄를 짓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에게는 엄중하게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도 언급(8:17)하셨던 신명기 19:15의 말씀을 지키는 전통에 따라 두세 증인의 증언을 통해서 그들의 잘 못을 밝히고 엄중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한다. 분명히 그들은 12:20-21에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싸움과 수군거림과 교만과 무질서를 유발한 사람들이며, 부정하게 행하고 음란하며 방탕하게 행동했던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바울에게 사도의 진위여부를 증명해 달라고 요구까지 하였다(3).

 

바울은 그들을 마냥 인내하고 받아드릴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의 삶에 비추어 경고한다. 예수님은 약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맞다. 그 약함 때문에 바울도 온유하게 성도들을 대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약하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다. 그 능력은 죽음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의인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이다. 하나님은 죄의 권세를 파멸하시고 공의를 세우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그 능력에 의지하여 죄를 행한 자들을 다룰 것이라고 경고한다. 바울이 약하게 보였던 것은 결코 그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고후12:9-10에서 언급했듯이 바울이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서 오히려 강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의 인간적인 한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 그것만큼 확실한 사도로서의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복음의 진리를 올바로 가르치는 것은 전제로 하고 말이다.

 

2) 바울이 사역하는 목적을 설명하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위해 바라는 것은 이것이었다.

. 믿음을 스스로 시험(test,페이라제테)하고 검증(examine,도키마제테)해 보라

고린도교회는 거짓 교사로 인해 바울의 사도직을 시험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리어 바울은 교회에 각자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검증해 보라고 촉구한다. 시험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의미가 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로 인한 변화가 어떤 것이며, 현재 어떻게 믿음위에 성숙해가고 있는지를 성찰해 보라고 말한다. 또한 검증은 보석을 감정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스스로 살펴보고 불순한 행동과 마음을 제거하여 정결하게 유지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 악을 저지르지 말고 옳은 일을 하라

여기에서는 악한 일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문맥으로 보아서는 바울을 거부하고 교회공동체를 분열하려는 행동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6,7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실격자(아도키모이, 6)가 아니라 합격자(도키모이, 7)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실격자처럼 보였다고 하더라도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이 옳은 일만을 하도록 애썼다는 것을 알기를 원했다. 그 옳은 일은 진리를 바탕으로 하는 일이다(8). 선과 악의 구별은 바로 진리가 기준이다. 진리를 올바로 알 때, 우리는 선과 악에 자유를 경험한다. 진리를 근거로 행동할 때, 때론 갈등이 있으나 오히려 그것이 공동체를 거룩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그러나 진리를 바탕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선과 악을 왜곡한다. 그래서 분열과 파괴만 남는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자신이 가르친 진리대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것을 기도한다.

 

. 완전하게 되라

바울은 성도들이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 사역을 하는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온전하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마치 찢어진 그물이 다시 촘촘하게 기어지듯이(1:19), 같은 마음으로 분쟁이 해결되는 것(고전1:10)을 의미한다. 자신의 잘못은 공동체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잘못을 고집하면 공동체에 분열을 야기한다. 서로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를 기대해야한다. 그것은 그물에 기어지듯이 진리위에 세워진 공동체와 이어질 때, 자신도 온전해지고 공동체도 온전하고 건강하게 세워질 수 있다.

 

목회자의 권위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잘 못한 이들을 꾸짖고 회개하도록 주님께서 권한을 주셨다. 하지만 그 권한은 성도들을 넘어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교회를 올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기대하기를 고린도교회가 잘 못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바울을 다시 만날 때, 엄한 조치를 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3)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축복하다.

 

바울은 마지막 권면을 한다.

 

. 기뻐하라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한 마지막 인사이다. ‘안녕히 계십시오정도. 하지만 기뻐하다는 원래의 의미가 좀 더 깊게 스며있다. 3:1에서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리고 빌4:4에서 주 아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바울의 마음이 깊이 담겨 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며, 그 동안 고린도 교회가 분쟁으로 인해 갈등의 아픔과 징계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주님으로 인한 기대가 있다.

 

. 온전하기를 힘쓰라

온전하다는 뜻을 9절의 의미와 같다. 아직 고린도교회의 갈등이 남아있고, 혼란과 무질서가 있지만 어긋난 부분을 진리로 잘 조정하고 화합하며, 정결하지 못한 부분을 잘라내서 조화롭고 거룩한 공동체로 세워가야 한다.

 

. 서로 격려하라

파라칼레이스테로 쓰인 이 말은 수동태 명령어이다. , 위로를 받으라는 의미이다. 참된 위로는 인간이 생성해 내는 감정이나 말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도움이다. 그러므로 서로 하나님의 위로를 전해서 격려해야한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성령님이 바로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

 

.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것은 사람들의 획일적인 생각이나 사상으로 하나가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인 온유와 인내, 그리고 그분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품과 복음으로 고린도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대했다. 자칫, 교회에 침투한 거짓 문화에 젖어서 그것을 습관적으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말씀을 묵상하고 살아내려고 힘쓰면 그 말씀이 모든 성도들을 같은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게 하실 것이다.

. 화평하게 지내라

화평은 샬롬을 뜻한다. 성도들이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살아간다면 공동체 안에 화평을 이루게 될 것이다. 화를 내고 다투고 시기하고 뒤에서 수군거리고 어지럽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다. 온전히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과 가르침에 시선을 고정할 때, 내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이 동일한 한 몸된 지체이며 함께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고린도 성도들이 온전하기를 힘쓰고 서로 격려하며 같은 마음을 품고 화평하게 지내도록 노력한다면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 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하라고 권면한다. 모이면 서로 반갑게 환영하고 공동체에 환대하는 것은 중요하다. 신분의 귀천과 경제적 상황과는 관계없이 교회 안에서 서로 기쁘게 맞아주고 존중해 주는 것은 모든 교회가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이다.

 

교회 공동체를 온전하게 세우시고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사랑이 성도들에게 신실하게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과 긴밀한 교제(코이노니아)를 통해서 그분의 성품을 들어내시고 성도들의 삶을 인도할 것이다.


2. 적용

1) 내가 사역하는 공동체에게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공동체가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목회자로서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문제가 없을 때 보통 그렇게 보인다. 목회자들의 착각이다. 대부분 성도들이 성숙해서 그럴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목회자들을 존경하고 목회자들이 하는 사역에 동참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목회자로 주어진 공동체에 사역을 하다가 평신도 입장이 되다 보니까 그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 자신도 그렇거니와 내 주변에 사람들도 교회 목회자들에 대한 태도를 솔직하게 알게 되었다.

오히려 목회자들이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는 경우는 스스로 겸손할 수밖에 없어서 자신의 처지를 잘 알지만, 소위 능력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경우는 마냥 교인들이 존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교회의 내외적인 사역을 확장하거나 새롭게 추진하는 상황 속에서 그것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성도들은 알면서도 잘 따라준다.

바울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존경을 하던 그렇지 않던, 심지어 사도권까지 인정받지 못한 처지에도 그에게는 분명한 소망과 기대가 있었다. 그것은 성도들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 개인의 삶이 경건하고 공동체 안에서 덕을 세우며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라는 것과 같은 그 다음이 없다. 오직 그것다. 자신의 평판은 오직 주님께 맡겼다.

나는 어떤가? 성도들을 온전케 세우도록 힘쓰는 것만으로도 아주 바람직한 사역일 것이다. 하지만 늘 그 다음 기대가 있다. 성도들이 온전케 되는 것이 나의 목회 성공 스토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목회자들이 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나의 삶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가?

 

바울은 늘 약함을 자랑했다. 그것은 콤플렉스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그리고 복음은 인간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만큼 자신을 통해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실전에서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누구 앞에서건 겸손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경우가 더러 있지만 목회자들은 참 말이 많다. 그 만큼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모양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이야기하는 듯해도 결국 자기 자랑인 경우가 허다하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마음에 새기자. 그리고 늘 주님과 사귐 속에 풍성한 은혜를 누리자. 남들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내가 받은 소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나와 함께 이 길을 가는 동료들이 같은 마음으로 서로 위로하며 같이 걸어가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지기를.  

'설교 > 매일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위기23장: 절기  (1) 2016.10.18
레위기 16장: 대속죄일  (0) 2016.10.18
바울의 변론  (0) 2016.09.13
고리도전후서 배경  (0) 2016.09.05
다윗의 찬송시 3  (0) 2016.09.02

관련글 더보기